의뢰인이 팥으로 메주를 쑤었다고 해도

202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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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맡으면 의뢰인을 전적으로 믿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의뢰인이 팥으로 메주를 쑤었다고 말해도 일단 그 말을 전제로 사건을 봅니다. 이 원칙이 어렵고 무겁게 느껴졌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맡았던 대여금 사건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까요

의뢰인의 말은 사건의 출발점입니다. 변호사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의뢰인이 한 말을 사실로 놓고 사건을 시작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들은 말을 그대로 법원에 옮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을 법률적으로 해석하고, 믿기 어려운 대목이 있으면 그것을 받쳐 줄 증거를 의뢰인에게 요청합니다. 믿는 일과 따져보는 일은 함께 갑니다.

차용증과 문자가 있는데도 상대가 부인한다면

사건은 단순하고 명백해 보였습니다. 빌려준 돈은 천만 원 남짓으로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습니다. 컴퓨터로 작성하고 양쪽이 도장을 찍은 차용증이 있었고, 거기에는 현금으로 건네받았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변제기가 지난 뒤 상대방이 언제까지 보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보낸 문자메시지도 있었습니다. 의뢰인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문자였습니다.

그런데 소송을 제기하자 상대방은 격렬하게 부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차용증의 도장은 자기가 찍은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도장이 왜 거기에 찍혔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문자메시지는 그날 의뢰인을 만나 식사를 하였는데, 의뢰인이 자기 휴대전화로 몰래 보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로 자기 휴대전화에는 그 문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변명이었습니다. 저희는 차용증의 도장이 상대방의 인감도장이라는 것까지 증명해냈습니다.

상대가 저렇게 억울해하는데, 의뢰인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요

난감했던 것은 변명보다 태도였습니다. 상대방은 법정에서 울며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법원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부터 울어 앞 재판이 방해를 받았고, 법정 경위에게 법정 밖으로 내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재판 도중 너무 흥분해 과호흡이 오는 바람에 재판이 중단된 적도 있습니다. 판사에게 편지를 몇 통이나 썼고, 지인들의 탄원서를 수십 통 냈고, 우리 의뢰인을 소송사기로 경찰에 고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천만 원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한 돈도 아니었습니다. 흔한 민사 사건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흥분과 억울함의 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뢰인에게 여러 차례 물었습니다. 문자메시지는 어떻게 된 것인지, 상대방 말 중에 조금이라도 사실이 있는지. 의뢰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문자메시지를 보낸 날 상대방을 만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일하던 중에 상대방에게 전화로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상대방이 그 문자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의뢰인도 상대방이 왜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통화기록은 시간이 너무 지나 통신사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의뢰인의 말을 사실로 믿고, 재판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태도에 흔들린 재판부는 몇 번이나 조정기일을 열었고, 아예 돈을 안 받는 걸로 합의하면 어떻냐는 화해권고결정도 내렸습니다. 의뢰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희는 거기에 응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대방을 볼 때마다 의뢰인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저는 변호사로서 그 의심을 힘겹게 눌러 내렸습니다.

사건이 모두 끝난 뒤에야 알게 된 것

1심에서 이겼습니다. 상대방은 항소하고 상고까지 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억울함을 온몸으로 드러냈고, 시위를 하고 문자메시지 테러까지 벌이다가 형사처벌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저희가 전부 이겼고, 집행도 힘겹게 마쳤습니다. 이기고도 마음이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의뢰인이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이 저렇게 억울해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의뢰인의 거짓말에 동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끝까지 꾹꾹 눌러가며 사건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모두 마무리되고, 그 사건을 잊어 갈 무렵, 의뢰인이 사진 몇 장을 보내왔습니다. 결혼식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이걸 왜 보냈을까 했는데, 그날이 바로 그 문자메시지가 보내진 날이었습니다. 문자가 보내진 시각도 결혼식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상대방은 그 결혼식 단체 사진에 있었고, 의뢰인은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말이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왜 그랬을까요. 의뢰인도, 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였든, 저는 지금도 의뢰인이 팥으로 메주를 쑤었다고 하면, 그 말에서 시작합니다.